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 있어야 나 역시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만들어 주는 장치다. 하지만 규칙이 존재하더라도 지켜지지 않거나, 위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규칙은 점차 힘을 잃게 된다. 이때부터 공동체의 행동을 조정하던 기준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개인의 판단이 기준이 된다
규칙이 제대로 작동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면서 공통된 기준을 참고한다. 하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점차 규칙보다 자신의 편의와 판단을 우선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업무 공간에서 정해진 업무 순서가 있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대부분 그 순서를 따른다. 그러나 누군가 자기에게 편한 업무를 임의로 선택해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같은 업무를 두고 서로 다른 사람이 동시에 하거나, 반대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업무가 남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규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규칙보다 개인의 판단이 더 강한 기준이 된 것이다.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규칙의 중요한 기능은 서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교통 신호가 대표적인 사례다. 운전자는 빨간불이면 다른 방향의 차량이 멈출 것이라고 예상하고, 보행자는 보행 신호가 켜지면 차량이 멈출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줄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초록불이 켜져도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고, 빨간불인데도 차량이 움직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신호보다 주변 차량의 움직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결국 규칙이 제공하던 예측 가능성이 사라지고 불확실성이 커진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
규칙이 무너지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두가 오전 6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조직에서 일부 사람이 6시 10분에 출근해도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규칙을 지키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만 일찍 출근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규칙을 지켜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굳이 지킬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생각이 확산되면 규칙을 지키던 사람까지 규칙에서 이탈하게 된다.
예외가 반복되면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규칙은 한 번에 무너지기보다 작은 예외가 반복되면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누군가 규칙을 어겨도 특별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행동이 반복되고도 계속 허용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예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 허용되는 행동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규정에는 6시 출근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6시 10분까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조직에서 작동하는 실질적인 기준은 6시가 아니라 6시 10분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공식적인 규칙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생기면 규칙의 권위는 점차 약해진다.
규칙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규칙은 단순한 행동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만들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도 규칙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런데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속해서 아무런 문제 없이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규칙을 지킬 것이라고 믿지 않게 된다.
그러면 공동체의 행동은 협력보다 자기방어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있으니 나도 내 이익부터 챙겨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많아질수록 공동체에서 협력하기가 어려워진다.
관리자는 더 많은 통제를 하게 된다
규칙이 자율적으로 지켜지지 않으면 관리자는 이를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감시와 확인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출근시간을 지키는 간단한 규칙만 있으면 됐지만,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출퇴근 기록을 확인하고 지각 여부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업무 역시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이 정해진 기준을 자율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관리자가 일일이 확인하고 지시해야 한다.
따라서 규칙이 무너질수록 자율성은 줄어들고 관리에 필요한 비용은 증가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규칙을 무조건 강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규칙이 무너졌다고 해서 모든 규칙을 더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현실과 맞지 않는 규칙이나 불합리한 규칙은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상황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규칙에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을 똑같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과 상황에 따라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규칙은 단순히 엄격한 규칙이 아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고, 실제 상황에서도 작동하며, 필요할 때 수정할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한다.
규칙은 존재하는 것보다 실제로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규칙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규정을 위반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규칙을 자신의 행동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규칙이 제대로 작동하면 사람들은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도 결정하기 쉬워진다. 반대로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개인의 판단이 앞서고, 서로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며,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결국 규칙에 대한 신뢰까지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을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규칙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규칙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충돌하지 않고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예측 가능한 기준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